합천의 인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바로 읽자(2)
류해을
합천문화원 이사
임진년(공민왕 1, 1352년) 여름, 묘향산(妙香山) 금강굴(金剛窟)에 머무셨다. 공부가 더욱 진척되어, 졸기라도 하면 종과 경쇠를 쳐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 주는 이가 있는 듯하였다. 이때 미심스러웠던 것이 환히 풀림을 깨닫고, 급급히 자신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스승을 찾고자 하였다.
계사년(공민왕 2, 1353년) 가을, 앞장서서 연경(燕京)으로 가셔서 인도인 지공(指空)스님을 뵙고,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3,800리(1,520㎞)를 와서 화상(和尚)의 얼굴을 직접 뵙습니다.” 하셨다. 그러자 지공(指空)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인 모두가 죽겠구나!”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허락하신다는 말씀이어서 대중은 크게 놀랐다.
다음해 갑오년(공민왕 3, 1354년) 정월, 법천사(法泉寺)로 가셔서 나옹(懶翁)을 뵈었다. 나옹(懶翁)께서 한번 보시고도 훌륭한 인재임을 아셨다. 무령(霧嶺)을 구경하시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다시 나옹(懶翁)을 뵙고는 여러 해 머무셨다. 선정(禪定)을 닦고 계실 때엔 밥 때가 되어도 아시지 못하시니, 나옹(懶翁)께서 보시고, “너는 죽었느냐?” 하시면, 대사께서는 웃으시며 대답치 않으셨다.
나옹(懶翁)께서 하루는 대사와 계단에 앉으시며, “옛날에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함께 돌다리를 보다가, ‘누가 만들었을까?’ 하니, 수좌(首座)가,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趙州)가 다시, ‘어디를 먼저 시작했을까?’ 하니, 수좌(首座)가 대답치 못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네게 이 일을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겠는가?” 하시니 대사께서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시니 나옹(懶翁)께서 그만두셨다.
그날 밤 대사께서 나옹(懶翁)의 방에 드시니, 나옹(懶翁)께서 “오늘에야 내가 너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시고, 나중에 “아는 이가 세상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까지 통하는 이야 몇이나 되겠는가? 너와 나는 한 집이니라.” 하셨다. 또 “도(道)가 있으면, 코끼리의 엄니처럼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 다른 때, 네가 어찌 남의 물건이야 되겠는가?” 하셨다.
대사께선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미심쩍은 부분을 거의 풀었으나, 산천을 돌아다니고 스승과 벗들을 찾아다니고자 하는 뜻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강절(江浙行中書省 : 원(元)의 행정구역 이름)지역으로 떠나고자 할 때쯤, 남쪽 지역에 발생한 변란으로 길이 막혀 못가셨다.
병신년(공민왕 5, 1356년) 여름, 귀국하기 위해 인사를 드리니, 나옹(懶翁)께서 편지 한 통을 써주시고 전송하시기를, “날마다 움직이는 전체적인 기틀과 세상살이는 다르다. 그러니 착함과 악함, 성스러움과 간사함을 생각지 말고, 인정이나 의리도 따르지 마라. 말하고 기를 뱉는 것을 마치 화살의 끝이 마주 버티고 있는 것 같이 하고, 구절과 뜻이 기틀에 맞는 것은 물이 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라. 한 입으로 손님과 주인의 구절을 삼켜버리고, 몸으로 부처와 조사(祖師)를 꿰뚫어 흡수시켜라. 갑자기 떠난다 하니, 게송(偈頌)으로 전송하겠다.” 하셨다. 게송(偈頌)에,
[주머니 속에 다른 세계 있음을 믿는다면, 동서에 삼현(三玄)을 쓰도록 맡겨라.
누가 너에게 선(禪)이 뭐냐고 묻거든
면전을 쳐서 거꾸러뜨리고 다시 말하지 마라.]
대사께서 돌아오신 뒤에, 나옹(懶翁)께서도 지공(指空)에게 ‘삼산양수(三山兩水)’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돌아오셔서 천성산(千聖山) 원효암(元曉庵)에 머무셨다. 기해년(공민왕 8, 1359년) 여름에 대사께서 찾아뵈니, 나옹(懶翁)께서 불자(拂子 : 먼지떨이)를 주셨다.
나옹(懶翁)께서 신광사(神光寺)에 계시므로 대사께서도 가셨다. 나옹(懶翁)의 제자 중에 대사를 시기하자, 대사께서 아시고는 떠나셨다. 이때 나옹(懶翁)께서 대사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는 말이나 글만 못하다.” 하시고 시를 주시며, “일없는 중들이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을 일으켜 시비를 함부로 말하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산승(山僧)은 이 네 구절의 게송(偈頌)으로 훗날의 의심을 영원히 끊으라.”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