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여론마당(오피니언)

신재 주세붕(2)

이성동
논설위원

군내 역사인물 탐구 시리즈(5)

주세붕은 1495년(연산군 1) 주문보와 부인 황씨의 차남으로 합천군 천곡리(지금의 율곡면 문림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경유(景遊), 호(號)는 신재(愼齋) · 손옹(巽翁) · 남고(南皐)이다.
1501년(연산군 7) 7세에 부친을 따라 칠원 무릉리로 이거(移居)하였다.
1522년(중종 17) 28세에 사마시와 문과별시에 합격하였고, 31세에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홍문관 정자(正字)를 거쳐 34세에 수찬이 되었을 때 기묘사화 이후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을 것을 간하는 ‘계옥시(啓沃詩)’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1530년(중종 25)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는 중종의 사돈인 김안노(金安老)를 탄핵할 것을 요구하다가 파직되었다.
1532년(중종 27)에 성균관 전적으로 복귀하여, 43세에는 모친의 봉양을 위해 곤양군수로 내려갔지만, 그 이듬해 두 번째로 파직되었다.
1541년(중종 36) 47세에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기용되어 그해 7월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가 이곳에 부임해왔을 때, 이곳의 향교는 문묘(文廟)가 퇴락해 있었고, 지방의 교육도 향교의 재정난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개인이 서재(書齋)나 정사(亭舍)를 지어 일정부분 교육을 하고 있었지만 교육의 양과 질에 있어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주세붕은 이와 같은 향교와 사학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원 건립을 추진하여, 1542년(중종 37) 그의 나이 48세에 백운동서원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가 세운 백운동 서원은 후임으로 풍기군수에 부임한 이황의 건의로 1550년(명종 5) 최초로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賜額)되면서 조정이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서원은 이후 사학교육기관으로서 지방 사림들의 집합소로서, 공론(公論)을 형성하여 조선시대의 정치문화 및 사회적으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 시대를 주도하던 사림의 본거지였다.
이후 서원은 향촌의 선비와 명망 있는 선비들이 연결되면서 체계적인 교육시설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연산군 이후 조정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자신의 사회, 경제적 기반이 있는 향촌으로 낙향하여 관료생활 중에 소홀히 했던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수기(修己)를 통해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새롭게 했던 곳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조정에 다시 진출하는 재충전의 기회로 삼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사림(士林)’ 또는 ‘사림파(士林派)’라 칭했다. 이들은 16세기에 훈구파,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在野士類)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말한다.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로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書院)이나 서재(書齋)를 통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 도학적 특색을 지니고 성리학의 의리관(義理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군주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주도 선비들에 의해 경연(經筵)을 통해 군주로서의 수기(修己)와 자질을 갖추는 교육을 받았으며, 군주가 도학적(道學的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폭정(暴政)을 일삼았던 연산군이나 광해군을 축출했던 사건들이 정당화 될 수 있었던 논리적 명분이 세워진 것이다. 왕권의 패도정치(覇道政治)를 막고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케 했던 사림의 힘은 그 배경이 서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서원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또한 서원을 처음 풍기에 세운 주세붕의 업적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세붕 그는 조선을 유교 이데올로기로 통치하도록 최고 통치권자인 국왕에게 경연(經筵)을 통해서 유학을 가르치고 60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진을 거듭한 탁월한 정치인이자 유학자였다.
1677년(숙종 3)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18년(순조 18)에 문민(文敏)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문민이라는 시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가사와 가곡 등 문학적 재질에도 뛰어나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단가(短歌) 등 1300여 편에 이르는 시가(詩歌)를 창작하였고,《죽계지(竹溪志)》,《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進獻心圖)》와「심도이훈(心圖彛訓)」등의 저서도 남겼다.
고려말 몽고와의 30년 동안의 전쟁과 90년간의 무신정권에 의한 무단 정치, 불교의 종교적 구심점의 상실 등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한 국가 위기상황에서 성리학 이론을 원(元)으로부터 도입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고, 자주적인 국가경영과 사회윤리 확립에 이념적 토대를 마련했던 안향을 제향하고, 그의 경학(經學)사상과 자신의 교학(敎學)정신을 구심점으로 새로운 국가 지도자 양성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우리 역사에 큰 위업을 달성했던 신재 주세붕 선생의 탄생지가 이곳 합천 율곡 문림리였다는 사실에 합천군민은 누구나 무한한 자긍심(自矜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주세붕 선생이 태어난 합천 율곡 문림 마을에는 선생의 위업(偉業)을 기리고, 제향(祭香)을 올릴만한 사당(祠堂) 한 칸 제대로 없음은 물론, 생가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할 때, 심히 부끄러운 마음 또한 감출 수 없다. 21세기 역사와 문화의 자원이 관광자원이 되는 시대에 존현덕업(尊賢德業)과 안민교학(安民敎學)을 위해 평생을 바친 주세붕 선생의 위업(偉業)을 기리고 이를 널리 알리며, 후대에 기리 전승하기 위해서 그의 생가와 사당을 세우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합천인에게 주어진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역사와 문화의 고장 합천인의 자부심과 문화관광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당국의 용단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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