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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치자꽃 피는 집-문경자

문경자
논설위원

치자나무는 늘푸른나무로써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며 키가 2~3미터 정도로 작은 나무이다. 은은한 향을 즐기려면 홀 꽃을 달고 있는 치자나무를 심는 것이 좋다. 그래서 가정이나 학교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치자열매는 황색색소가 들어 있어 천연 염색원료로도 널리 쓰였다. 아낙들은 치자 열매를 깨트려 물에 담가 두기도 하였다. 물감이 귀한 때라 치자 물을 이용하여 옷감이나 종이 등에 치자 물을 들였다. 옛날 사람들은 생활용품에도 아름다움을 더하여 물감을 많이 활용하였다. 어머니도 명절 제삿날 치자열매로 우려낸 물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부침을 하였다. 어머니의 손등도 노랗게 물들었다. 지금의 인공 물감에 비하면 치자열매는 무공해 물감으로 그 쓰임새가 으뜸으로 쳤다.
내가 살던 집 돌담에는 치자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키 큰 벚꽃나무보다 치자나무는 볼수록 키가 작은 어머니를 닮은 듯하다. 해가 기울어갈 무렵에 쳐다보면 소복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초여름에 흰빛으로 피어 짙은 향기를 풍기는데 어머니 분 냄새처럼 코끝을 스친다. 향기가 제아무리 풍겨도 아름다운 꽃은 지고 나면 그뿐이다. 하지만 봄이면 다시 피어나는 꽃. 사람은 한번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할아버지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할아버지가 손녀를 키웠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살면서 가끔씩 다녀가곤 하였다. 집안에 새사람이 들어오면 힘든 일이다. 그러니 나하고 같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엄마 없는 서러움을 덜 받는다고 했다. 그때부터 손녀와 함께 힘든 삶을 살았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하고 사는데 왜 나는 할아버지와 살까! 해가 질 무렵 치자꽃이 피면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달려오려나 하고 그 아래서 기다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어미는 이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밥 잘 먹고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라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엄마가 있어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텐데 라며 할아버지에게 떼를 쓰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눈속에 이슬이 반짝였다. 할아버지 눈속에 별이 떴나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얼굴을 돌릴 때 뜨거운 물방울이 내 손등에 떨어졌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산에 가서 땔감도 마련하였다. 큰 나무는 톱으로 쓸거나 도끼로 쪼개어 썼다. 나무 한 짐을 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가곤하였다. 봄이면 보리수 열매도 따서 먹었다. 간식으로 그만이었다. 보리수 씨가 보리 같이 생겨서 아주 멀리 혀로 힘껏 날려 버렸다. 삼시 세끼 보리밥을 고봉으로 먹어도 금방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그 소리에 놀라 얼른 밥을 챙겨 주었다. 먹어도 금방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없는 서러움 같은 배고픔인지 모르겠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할아버지는 치자꽃이 핀 돌담을 끼고 돌아서 갔다. 왜소한 몸이 허수아비처럼 외로워보였다. 쌀 한되 사고, 가느다란 꼬챙이 같은 간 갈치 두 마리 짚으로 묶어 덜렁덜렁 들고 오는 모습이 보이면 나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할아버지” 하고 웃으면서 불렀다. 나비도 같이 내 머리 위로 자꾸만 따라온다. 할아버지는 “깅자가 치자꽃인 줄 알고 나비도 날아오네” 하고는 웃었다.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기분이 좋아 콧노래 부르면서 갔다. 동네 아낙들은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인사도 못하고 보조개가 생길만큼 웃었다. 할아버지가 사준 꽃무늬 몽당치마도 춤을 추었다. 힘은 부치지만 고소한 갈치 먹을 생각에 신이 절로 났다. 숯불에 구워진 갈치는 허리가 더 가늘어서 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젓가락으로 살을 떼어서 갈치살 맛을 보라며 밥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그 맛을 어디에 비기랴!
할아버지는 내가 먹는 모습만 보아도 흐뭇해하였다. 다음 장날에는 큰 놈을 한마리 사다가 맛있게 구워주마 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너거 아버지가 이번 주말에는 다녀가야 할 텐데” 하며 치자나무꽃 너머로 눈길을 주었다.
치자꽃 피는 집도 세월에 묻혀서 사라지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나의 삶이 웃음이 되고 눈물이 되고 보고픔에 허덕이던 곳.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할아버지 사랑은 언제나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밀짚모자에 꽂힌 치자꽃. 웃으며 꽃놀이 가시던 할아버지. 치자꽃 피면 보고싶다. 하얀 꽃잎 속에 피어나는 그리운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