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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합천향토사연구회 제2차 역사인물 및 유적답사 (4) – 이성동

이성동 논설위원

백운동 서원과 해주 수양서원을 건립하다
주세붕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교육개혁의 선구자요, 목민관(牧民官)으로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다. 1522년(중종1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풍기군수 재임시 1542년(중종37) 순흥면 내죽리 숙주사지(宿朱寺址)에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타 지역의 서원건립의 시원을 이루고, 우리나라 유학교육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백운동 서원이 소수서원으로 편액되던 해인 1550년(명종5)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해주에도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웠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여 오백년을 지속시켜왔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목적으로 예치(禮治)와 덕치(德治)를 주장하며 민생안정과 민생교화에 힘썼다. 이러한 민생교화책의 하나로 성립한 것이 서원이다. 서원은 이후 사학교육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방 사림들의 집합소로써, 공론(公論)을 형성하여 조선시대의 정치문화 및 사회적으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서원은 한 시대를 주도하던 사림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는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를 통해 온유(溫柔)한 덕성과 불의를 배격하는 굳센 기상을 겸비한 사람이 태어났고, 국가 경영과 사회운영을 논하는 대경륜이 창출되기도 했다. 여기서 유가(儒家) 최상의 정치사회운영의 형이상학적 사림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지치적(至治的) 실천철학으로써 사림은 정치에서 패도적(覇道的)인 부국강병(富國强兵)정책보다는 의리명분을 토대로 한 민심수습과 안정을 우선시했으며, 소수 권력집단에 의한 정책결정보다는 가능한한 지배층 전체가 참여한 토론에서 도출된 공론(公論)을 통해 정국(政局)을 운영했다. 비록 명분을 높임으로 인해 정책을 달리하는 붕당(朋黨)을 형성하고 정쟁(政爭)을 격화시키기도 했지만,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공동의 선(善)을 추구하고자 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붕당정치는 서양에서 기원(起源)했던 근현대의 민주주의의 그것보다 선진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조선사회의 독특한 의회정치의 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서원은 바로 조선의 사상과 여론을 민주적으로 이끌어 간 사림의 양성소였으며 그 활동의 기반이자 근거지였다.

서민도 먹을 수 있는 인삼재배의 길을 트다
주세붕은 풍기군수 재임시에 또 한편으로는 목민관으로서 민생을 자주 살피고,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궁리한 끝에, 내륙성 한랭기후에 통풍이 잘 되고 사질양토로 배수도 잘 되는 이곳 소백산 해발 4~500m인 고원지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을 재배하는 기술을 터득하여 당시 산삼에만 의존하여 국왕과 일부 권력층만 애용했던 이 기호식품의 재배기술을 농민들에게 전수하여 주었고,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그곳에서도 장뇌산삼을 경작하도록 장려하여, 일반 백성들도 먹을 수 있는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던 인삼재배의 선구적 역할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