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힘은 야로 야철(冶鐵)에 있었다. (4) – 이성동 논설위원
3. 발전
가. 4세기 합천(陜川) 다라국(多羅國)과의 결합
4세기에 들어와 대가야의 성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합천세력을 지역연맹체에 받아들인 것이다. 합천은 다라국(多羅國)이 위치한 곳이다. 이 다라국은 변한사회에서는 소별읍(小別邑)적인 성격의 정치체였다가 변한연맹체가 가야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크게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다라국은 4세기중엽 경에는 ‘가야 7국’의 하나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합천 옥전고분군은 이렇게 성장한 다라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라국이 가라국 중심의 지역연맹체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우륵(于勒) 12곡(曲)을 통해 대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륵 12곡은 대가야 중심의 연맹체에 참여한 세력들과 관련된 곡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맨 앞에 나오는 하가라도(下加羅都)와 상가라도(上加羅都)이다. 상가라도의 상가라(上加羅)는 고령 가라국에 비정되고, 하가라도의 하가라(下加羅)는 합천 다라국에 비정된다. 이처럼 다라국이 하가라로, 가라국이 상가라로 표기된 것은 백제의 경우 온조를 시조로 하는 세력과 비루를 시조로 하는 세력이 시조를 형제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다. 백제의 시조형제설화는 지역연맹체의 형성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상가라, 하가라로 표현된 가라국과 다라국도 지역연맹체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라국이 가라국 중심의 지역연맹체에 참여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시기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합천 옥전고분군의 목곽묘(木槨墓)이다. 옥전고분군의 목곽묘는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할 때 무개투창고배(無蓋透窓高杯)를 표지로 하는 제1단계, 유개유투창고배(有蓋有透窓高杯)를 표지로 하는 제2단계, 개배(蓋杯)와 유개식장경호(有蓋式長頸壺)가 부장되는 제3단계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옥전 23호분의 대형 고배형기대는 고령양식 토기로 볼 수 있으며 그 시기는 5세기 1/4분기에 해당되는 고령 지산동 35호분 단계이거나 그보다 빠르다고 한다. 이러한 접촉은 단순한 문화적 교류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교섭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늦어도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다라국은 가라국 중심의 지역연맹체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령 가라국이 합천 다라국과 긴밀한 연맹관계를 맺게 된 것은 신라가 점차 창녕지역과 성주지역으로 세력을 뻗어오는 것과 연계되어 일어났다. 신라양식 토기의 확산에서 보듯이 신라는 4세기 말엽에 창녕지역을 간접지배하에 넣었고, 성주지역도 5세기에 와서는 신라양식 토기가 들어와 고령과 문화양상을 달리하면서 신라의 간접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창녕·성주 세력들이 신라에 기울어지게 됨으로써 낙동강 수로는 신라에 의해 통제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낙동강 본류의 수로를 이용하여 중개무역의 이익을 누리고 있던 고령 가라국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이에 고령 가라국은 낙동강 본류 수로가 통제됨에서 오는 교역로의 제약을 극복하고 또 자신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서부 경남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고령 가라국은 합천 다라국을 지역연맹체에 편입시키는 것을 적극 도모하게 되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서부 경남지역으로 진출해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