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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졌던 왕국 합천 「다라국(多羅國)」(3) – 이성동 논설위원

이러한 금속유물의 원류(原流)는 고구려지만 토기와 묘제의 양상을 보면 부산·김해지역에서 이미 정착된 문화가 이 지역에 들어왔으며, 이 때 단순한 문화전파가 아니라 주민의 이동에 의한 유입이라고 생각된다.
옥전 23호분의 묘지는 동래 복천동 고분과 같은 형식인데 이들은 옥전고분군의 정체성(正體性)을 말해 준다. 화려한 용봉문환두대도, 최고 권력자가 사용하던 出字형 관모, 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말 투구, 경제력을 상징해주는 수많은 옥과 구슬들, 옥전왕국은 이렇게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전에 왕국이 존재했었다면 나라 이름이 어디엔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나라 이름이 없다면 지금까지 설정한 가설이 검증되지 않고, 따라서 옥전왕국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수밖에 없다. 가설(假說)이 정설(定說)이 되기 위한 조건은 옥전에 세워진 나라 이름을 어디에선가 찾아야 한다.
나라 이름, 이것을 찾기 위해서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이 옥전왕국의 나라 이름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양직공도(梁織貢圖)’라는 중국 양나라 때의 기록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 ‘양직공도’는 6세기 때 만들어진 사신도(使臣圖)이다. 당시에 당나라와 교류를 하던 백제와 왜 등 주변 국가의 몇 개의 나라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과연 옥전왕국의 나라 이름이 무엇인지, 이 문서를 주목하는 까닭은 ‘다라’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옥전고분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같은 이름의 다리가 있다. 그 다리 건너에 쌍책면 ‘다라(多羅)’라는 마을이 있는데, 다라리는 옥전 유적지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이 고을에 살았던 이영기 향토사학자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 마을은 다라리(多羅里)라고 알고 있다. 이 마을 이름은 옛날부터 그렇게 불려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양직공도(梁織貢圖)에 나오는 ‘다라국’이 옥전지역일까?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아본다. 합천읍은 옥전고분에서 황강 상류에 있다.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의 합천은 삼국시대에 대야성이다. 대야(大耶)와 다라(多羅) 사이에 국문학적인 연관을 따져 보면, 인제대 사학과 이영식 교수는 “삼국사기에 신라가 이 지역을 통합하고 대량주를 설치했다고 되어있다. 그 대양도 큰대(大)자, 좋을 양(良)자를 쓰지만, 고대의 발음은 ‘대양’이 ‘다라’였을 것이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를 했다고 하는 그 유명한 ‘대야’ 또는 ‘대야성’이 기록되어 있다. ‘耶’도 ‘羅’와 같이 자전을 찾아보면 땅이름 ‘라’ 땅이름 ‘야’로 되어있다. 따라서 대야(大耶)=다라(多羅)이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8세기 전반에 일본서기에는 다라국으로 표현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말한다.
나라 이름과 그 위치가 정확했던 다른 가야에 비해 ‘다라’는 중국과 일본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결국 옥전왕국이 그 기록으로 보이는 다라국(多羅國)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라국의 중심은 어디였을까? 옥전 유적지 근처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토성의 흔적이었다. 발굴 직전의 사진에서는 토성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다. 토성은 옥전고분군의 바로 아래에 있다. 다라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토성 내에는 지배자의 생활공간, 토성 밖에는 일반인의 생활공간, 그리고 어딘가에 생산공간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조영제 교수는 말한다. 계명대 사학과 노중국 교수도 “다라국은 최소한 200년 이상 존속한 나라이다. 멸망 때까지 자기의 독자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치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용과 봉모양의 선명한 용봉문환두대도, 이 황금칼을 가졌던 나라, 그것은 다라국이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와 함께 병존했던 제7의 가야, 다라국(多羅國)이었다.
옥전고분군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계속해서 조성되어 가야고분의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장기간에 걸친 묘제의 변화와 부장유물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가야고분 연구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갑주(甲冑)와 마구류(馬具類)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고구려 기승문화(騎乘文化)가 남부지역으로 파급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5~6세기대의 가야사, 나아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묘제(墓制)와 대량의 위의구(威儀具)들은 이곳이 일본서기, 양직공도(梁織貢圖) 등의 사서(史書)에 이름만 전해오면서 막연히 합천 일대로 추정되었던 다라국(多羅國)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앞으로 김해 대성동과 양동, 거창 교동, 함안 도항리고분군 등과 더불어 옥전고분군 출토자료를 같은 시기의 경주나 공주, 부여지역 고분 출토자료들과 비교해봄으로써 가야의 역사와 문화, 삼국과의 관련 속에서 가야의 위상을 밝히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換頭大刀)’라는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황금칼을 가졌던 나라, ‘옥이 많이 출토되는 밭’이라는 데서 연유한 옥전(玉田)이라는 이름의 왕국, 신라·백제와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던 작은 왕국 옥전, 1980년대 합천댐 공사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토기와 용봉문환두대도를 비롯한 철갑주와 투구 등의 금동제 유물, 그리고 옥과 덩이쇠(鐵鋌) 등 2000여 점의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흥분은 물론이고, 전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옥전(玉田)이 삼국시대의 제국(諸國)들 사이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국가체제를 갖추었고, 합천 황강가의 나지막한 야산에, 작지만 강한 가야왕국이었던 것이다. 그 나라 이름은 다라국(多羅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