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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1) –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우리 합천에서 대장경세계문화축전 행사가 2017년 10월 20일부터 11월 5일까지 대장경테마파크 일원에서 17일 동안 개최된다. 특히 가을단풍이 한창 곱게 물들 철일 때라 가야산을 비롯하여 해인사 등지에 많은 관광객이 붐빌 것이다. 2011년 팔만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을 계기로 2013년과 올해로 세 번째로 개최되는 행사다.
합천군과 해인사에서는 “소중한 인연, 아름다운 동행”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많은 관광객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때 우리 합천 해인사를 찾는 관광객이나 군민들이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봐 이 글을 쓴다.

(1)해인사 팔만대장경판(국보32호)
팔만대장경은 처음 인도에서 생겨났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을 “경”,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것은 “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 놓은 것은 “론”이라 해서 경장, 률장, 론장이라 이것을 삼장이라고 했다.
이것이 중국으로 들어가서 부처님의 말씀을 조목조목이 묶어서 소장을 만들고 이 소장을 한데 묶어 대장으로 만든 것이 대장경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어떻게 하여 대장경이 만들어졌을까? 부처님 열반 후 3개월 후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500명의 비구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부처님이 45년 동안 이곳저곳에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을 아라한 한사람 한사람이 들은대로 설명하면 다른 스님의 동의를 얻어서 만들어 졌는데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如施我問”이라고 했다. 7개월 동안 채집을 해서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씀들을 한데 묶게 되었다. 그러면 대장경은 어떻게 해서 기록되었는가?
카트라 나무의 잎을 잘라서 기록했다. 철필로 쓰고 경이란 말은 수트라 즉 실이란 말이다. 꽃다발을 다발로 만들듯이 하나하나 소장을 엮어 대장으로 대장을 엮어 대장경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꽃다발처럼 만든 것이다. 대장경이 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6세기말 수나라 시대의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현종이 송나라로부터 대장경판을 들여와 보고 우리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을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현화사란 큰절을 짓고 반야경보라는 전담기구를 설치하여 76년에 걸쳐(1011년~1087년까지) 570질 5924권이나 만들었는데 이것을 대구 부인사에 봉안하다가 몽고족이 침입하여 1232년에 불태우고 인쇄본 1715판은 일본 동경 남선사에 봉안하고 있다. 이것이 즉 초조대장경이다.
다시 재조 대장경판을 만들게 되는데 고려 고종은 오랑캐의 침해에서 시달리다보니 불심으로 나라를 수호해 보자는 뜻으로 대장경판을 만들 계획으로 고종 23년(1236년)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란 전문기구를 설치하고 본사는 강화도에, 분사는 진주와 남해에 두고 16년간(1236년~1251년, 고종23년~고종38년)에 걸쳐 81,350판을 제작하게 되었다.
경판의 나무는 백화목(자작나무)이며 주로 섬 지방에 자생한 나무로서 이 나무를 채취하여 바닷물에 3년간 담갔다가 끄집어내어 판자를 켜서 소금물에 삶고 그늘에 말려 대패질을 해서 경문을 붓으로 쓰고(구양순체) 그에 따라 새긴 것이다.
경판의 규모는 가로 70㎝, 세로24㎝, 두께2.6㎝, 무게 3~4㎏이며 종류수는 1,514종, 권수는 6,802권, 부수는 1,560부, 글자 수는 5,200여만자로서 글자가 마치 한사람이 쓴 것처럼 필체가 일정하고 오탈자가 없다. 높이 3,200m, 무게 280톤, 길이 150리(60㎞)로 현존하는 목판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제작이후 강화도 선원사에서 봉안하다가 외침이 심하다보니 소실될 우려가 있어 일시 서울 지천사로 옮겼다가 태조 7년(1398넌) 낙동강을 이용하여 고령개(경)포를 통해 이운되어 해인사에 봉안 중이다.
해인사로 옮긴 이유는 해인사가 명산이라서 신령스럽다고 느꼈고 또 교통이 불편하여 안전지대라고 생각되었으며 심심산골이라 아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81,258판이 국보 3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