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인터뷰_1억 기부한 권병근 전축협조합장

“죽기 전 내가 가진 재산을 제로(0)로 만들고 싶다”
“내가 자란 야로에 보답을 한 것이다”

야로중학교 야구부에 1억발전기금을 기부하며 화제인 권병근 전축협조합장을 만나 기부의 동기와 그동안 인생역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다들 야로중학교가 모교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야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초등학교만 나오고 대구지역에서 학업을 마쳤다. (야로초30회, 대구계성중고 47회, 경북대 수의과대학 9회) 이후 지역에서 수의사로 활동하며 야로가 양돈의 중심지가 되는데 공헌을 했으며, 축협조합장을 3선 역임하며 합천축협의 기반을 구축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외 합천청년회의소특우회장(6대), 바르게살기합천군위원장(초대), 거창지방법원 합천법원조정위원장, 성균관유도회 합천지부회장(현)을 역임했다. /박황규 기자

 

1.큰 기부를 하셨다.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제가 야로 지역에서 났고, 돈도 야로에서 벌었다. 죽을때까지 쥐고 있을 필요없다. 야로를 위해 한번 쓰자 라는 생각으로 하게 됐다.
직접적 계기는 작년 가을 야로중학교에서 열린 유소년야구경기 결승전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옆에 배종길 야구부발전위원장과 함께 이야기하며 그런 생각을 냈다. ‘사람이 몇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죽는 시간을 몰라 그렇지, 죽을때 재산을 제로로 만들고 죽는게 낫다. 언제 죽는지 몰라 그렇게 못할 뿐이지’라며 논2마지기 값은 내겠다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단순한 생각이었는데, 현실화하려니 가족들 동의를 얻어야 했다. 맨먼저 형님(권병석 전합천문화원장)에게 이야기를 했다. 미리 말씀을 못드려 결례를 했는데, 이해를 해주시더라. 이어 안식구와 딸 등 식구들이 다 동의해줘 고맙게 생각한다. 가족 공동의 기부라 생각한다.

2.1억기부금은 어떻게 쓰이는가? (동석한 하성용 전 학교운영위원회 합천위원장 답변)
1억이란 큰 돈을 기부받는데, 마땅한 명분과 용처가 있어야 한다.
현재 선수들 휴게소가 없다. 선수들이 작은 집에서 지내기가 너무 불편하다. 장감독이 대구까지 학생들 출퇴근도 시키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3월이면 인원이 30명으로 늘어날 것인데, 개학하기 전까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재 40평형 규모의 2층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 설계도 끝났고, 허가가 받고나면 바로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다. 아마 그런 어려운 점을 보시고 이번에 기부하신 것으로 안다.

3.야로초등학교를 나오시고, 중학교부터는 외지에서 공부한 것으로 안다. 수의사부터 축협조합장을 역임하시는 등의 삶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린다.
당시 야로국민학교 졸업하고 대구에 시험을 보러갔다. 1차 사대부중은 어려워 떨어지고, 계성중에 들어갔다. 어릴 때였고, 혼자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며 외로움에 공부가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 “왜 촌에서 태어나 살게 됐을까?” “왜 촌사람은 이렇게 못살아야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또 ‘흙’이란 책을 읽고 나서 앞으로 나는 농촌계몽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농과대학을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어느날 형님(권병석)께서 진로에 대해 물으시길래 그렇게 대답했더니, “내가 촌에 와 농사를 지어보니, 농사 보다는 축산이 낫고, 축산을 하다보니 가축병이 나니 속수무책이더라. 수의과를 가라”고 충고를 해줘 경북대 수의과를 들어갔다. 당시 성적으로는 서울대도 갈 수 있었으나, 형편상 서울은 포기하고 가까운 대구를 갈수 밖에 없었다.
졸업하고 합천읍에서 개원을 했다가 다시 대병에 가서 했다. 그러다 야로에 와서 정착하며 가축병원을 열게 됐는데, ‘점쟁이와 의사는 고향에서 하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학교다닌 것을 알고 있는 지역민들에게 권위가 안 섰다. 7년 정도 하니 인정을 해주더라. 졸업하고 수의사를 하면서 공부를 더 많이 했다. 가축을 직접 보려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밥만 먹고나면 공부했다. 당시 군사혁명시절 차트가 유행했다. 그래서 돼지키우는 법을 차트로 만들어 야로 가야 묘산 5개 마을을 다니며 주민들을 위한 양돈교육 특강을 했다. 5개마을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야로면 하빈 묵촌 등 2개 마을만 남았었다. 3년 동안 여러번 가서 강의를 했다. 한빈은 한때 돼지가 103호수에 95집이 돼지를 키웠다. 완전 돼지판이었다. 당시 야로면에 돼지키우기가 유행이 돼, 공무원도 키우고 그랬다. 그때 야로면에 돼지가 2만두가 있었다.
돼지를 키우는데, 3년마다 한번씩 불경기 왔다. 2년은 호경기, 1년은 불경기였다. 특강을 다니는 중에 야로 가축시장에 가서 매일 그날 가격을 적어와 1년반동안 기록을 했다. 그래서 그래프를 그렸다.(이때 차트를 그린 사람이 하수갑 전조합장이다. 당시 군대다녀와 차트를 잘 그린다는 것을 알고 했고, 당시 자료가 아직도 있다.) 이것으로 피크사이클이 완성이 됐다. 적용해보니 딱 맞아 떨어졌다. 그 사이클 가지고 불경기를 한번도 안 만났다. 호경기 말쯤 암돼지를 팔고, 불경기에 새끼를 사서 키운다. 이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줬으나,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4.축협조합장을 오래 역임하셨다. 그 계기는?
당시 조합이 활동이 안좋아 어려울 때였다. 주변 사람들이 축협조합장을 하라고 권유를 해왔다.(김순재 라는 대양 사람) 그때 답이 ‘명예는 하늘에 뜬 구름이고, 돈은 흘러가는 물이다’라고 했다. 흘러가는 물은 씻기도 하고 놀 수도 있지만, 뜬 구름은 쳐다볼 수 밖에 없다. 명예 안한다는 이야기 였다. 그런데 축협 다 망해가는데 혼자만 잘 묵고 잘 살래 하길래, 말문이 막혔다. 또 사료장사 하던 정종엽씨가 도와주겠다고도 해서 하게 됐다.
당시 선거는 축협밖에 없었다. 다 임명제였다. 농협도 임명제였다. 선거 방식은 대의원 50명이 8명을 뽑아 조합장을 뽑는 방법이었다. 당시는 초창기로 돈을 쓰고 당선되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밥 사는 정도였다. 선거가 없으면 합천읍 사람이 하지 야로면이 못한다. 선거가 있기에 조합장에 당선이 됐다.
당시 야로에 젖소가 처음 들어왔는데, 병이 생기니 그걸 치료하느라 엄청 바빴다. 하루 나가 30~40만원 벌었다. 조합장 한달 급여가 36만원이었다. 조합장 하느라 가축병원 일을 제대로 못했다.
당시 조합을 바로 세우고 싶었다. 당시 환특업무, 자생업무 2가지 부서가 있는데, 환특업무는 군에서 해야할 업무를 대행하는 것인데, 종사자가 12명이고, 나머지 조합장, 전무, 직원 등 4명이 일했다. 서로간의 알력이 있어 그것을 깨려고 매주 직원회의를 했다. 한임기 마칠때쯤 되니 어느정도 봉합이 됐다. 당시까지 이렇다할 업적이 없어 재선에 나서게 됐다. 당시 ‘보리딩기’가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이걸 매입할 자금이 없어, 변용규 선배(경북대수의사)를 찾아가 이자없이 빌렸다. 그만큼 조합에 돈이 없을 때였다. 2선때는 무투표당선했다. 이후 점점 안정되어 가면서 직원16명이 35명으로 늘어나갔다. 업무가 안정되며 직원이 늘었다. 매번 정신교육을 시켰다. 각자가 조합장이라 생각하고 축협을 대표한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게 했다. 점점 융합이 되고 조합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두 해째에 전국에서 2등의 실적을 냈다. 촌조합은 물량이 없는 가운데 한 것이니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3번째 임기때는 경남도 대표로 중앙에도 가고 그랬다.
그래서 3년임기 2번, 직선제로 바껴서 4년임기 1번을 했다.(총10년) 젊은 나이를 축협에 바쳤다.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축협이 합천 몸통이다. 동부는 머리고, 남부 중부는 날개다 대병은 꼬리다 라고 보고 지점을 그렇게 냈다. 새가 날라가는 형상이 그때 완성됐다.
3선 마칠 때도 계속 하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가 안 했다. 최근 하창환 군수 불출마 선언을 들었다. 그 기분을 안다. 내 스스로 물러나가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이다. 어깨가 가볍고, 기분이 참 좋다. 지금까지 여러 선거를 겪어보았지만, 제발로 걸어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개 떨어지거나 쫓겨나갔다.

5.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 후배들 사회활동 도와주고 뒷받침하겠다. 사람이 죽는 나이 몰라 그렇지. 저승갈때 돈 가져 가는 사람 없다.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도 그 많은 재산 두고 갔다. 죽는 순간을 몰라 그렇지 안다면 죽는 순간 재산이 제로로 만들고 죽는게 제일 좋다.
예전 안식구가 아파 경북대 응급실을 자주 갔다. 응급실 가보니 전쟁터다. 위급한 환자들에, 멱살잡히는 의사와 얻어맞는 간호사도 있었다.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소명감이 없이는 못한다. 그걸 보고 이곳에 기부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단 야로중을 먼저 하게 됐다.